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 (문단 편집) == 의의 == 이 사건의 가장 큰 의의는 바로 '''[[1953년]] 7월 휴전 이후 한중 양국이 최초로 공식적인 외교적 접촉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은 중화민국을 [[중국 대륙]]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있었고, 반대로 중화인민공화국은 [[북한]]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간주하고 있던 시절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당시 북한의 요청으로 남한산 [[면직물]]에 대해 ‘원산지 증명’을 요구하여 [[대한민국]] [[면직물]] 산업에 타격을 주고 있었는데, 민항기 사건 이후 더 이상 원산지 증명 요구를 하지 않았다. 민항기 사건 후 대한민국의 대(對) 중화인민공화국 수출총액은 1983년 484만 달러에서 1984년 1,694만 달러로 급증했다. 사건 다음 해인 1984년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산권 국가 중에서 가장 먼저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참가 선언을 하게 되었고, 특히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는 아시아의 공산권 국가들 중 유일하게 참가했다. 반둥 회의에 참석한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한 이세기 국토통일원 장관은 중국 외교부장 우쉐첸에게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일본을 이길 자신이 있냐고 참석 의사가 있는지 돌려서 물었고, 우쉐첸은 심판만 잘 봐주면 문제 없다고 참석 의사를 표명했다. 이때 우쉐첸은 이세기가 중공 여객기 승객들을 자신의 지역구에서 먹이고 재웠다고 하자 크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이후 [[대한민국]] 역시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에 참여하는 등 [[스포츠]]를 통한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이때 우쉐첸은 이세기에게 한국에선 아직 한자를 교육하는가? 라고 물었고 이세기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우쉐첸은 한국의 학생들은 삼국지나 수호지를 읽는가? 라고 물었고 이세기가 역시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우쉐첸은 표정이 묘해지더니 소위 동맹이라는 북조선 친구들은 한자를 완전히 없애버렸고 중국 고전도 읽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당시 승객 및 승무원들이 [[서울특별시|서울]]에 머물면서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중 교류가 약 30년간 끊어진 상태라 중화인민공화국 인민들이 한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은 대부분 북한의 선전물이었기 때문에, 당시까지만 해도 '[[한성]](서울)은 전깃불도 제대로 안 들어오고 [[거지]]들이 우글거린다더라'라는 수준의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서울은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어느 [[대도시]]에 비해 크게 화려하고 발전된 모습이었으며, 특히 엄연한 적성국가 국민이었음에도 가는 곳마다 미소 띤 얼굴로 극진하게 환대해주는 한국인들을 보고 느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듯. 21세기 초반에 중국에 엄청난 건설붐이 볼면서 대도시 지역은 물론 중소도시에까지 마천루 시설을 건설하였고, 대도시는 물론 지방중심도시에서도 지하철과 전철망도 엄청나게 깔아댔기 때문에, 한국 대도시의 모습을 보면서 경외감이 든다는것은 옛말이 되었지만 1980년대 초반 당시에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 안팎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민경제 수준이 북한보다 훨씬 못했던 시절인지라 이러한 인프라 시설도 낙후될수밖에 없었다. [[지하철]]은 [[베이징]]에만 개통되었던 상태였고, [[21세기]] 이후로 [[야경]]으로 이름을 날리는 [[상하이]] 푸동지구도 당시에는 [[시골]] [[벽촌]]에 불과해있었으며, 조금만 외곽지대만 가도 전기같은 기초적인 인프라 시설도 깔려있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협상을 위해 방문했던 중국 간부들도 대단한 충격을 받았으며 이들은 동유럽 외교관들과의 대화에서 서울은 평양에서 선전하는 것과 전혀 다른 현대적이고 깨끗한 도시였다고[* 물론 당대에는 서울도 화장실 시설이 엉망인 경우가 허다하다거나 한강물이 각종 생활하수와 공장에서 흘러나오는 오폐수로 똥물화가 진행되는 등 환경이 썩 좋은 도시는 아니었지만, 서울올림픽을 개최를 기점으로 보여주기식이라도 시설개선에 총력을 쏟았던 시절이라서 한강정화사업을 벌이던가 재래식 화장실을 수세식 화장실로 활발히 교체하고 시민들의 의석개선 운동도 같이 벌였다. 이 당시 중국 화장실은 시설 관리가 엉망인 수준을 넘어 재래식이거나 화장실에 칸막이가 없는 경우가 많아서(이런 상태는 대략 2000년대까지 지속되어싿.) 고위급 인사들이 신선한 충격을 받을만 했다. ] 충격과 호의를 표시했다. 앞서 언급했듯 이들은 [[상류층]]들이므로 정보의 접촉면에서 일반인들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상류사회]]에서 이들의 한국 경험담은 꽤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당장 [[1988 서울 올림픽|88 올림픽]]을 통해 해외에 소개된 한국의 모습은 [[공산권]]뿐만 아니라 '''같은 [[서방]] 사회에조차'''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한(對韓) 외교정책 전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런 흐름이 계속 이어져 2년 뒤인 [[중국 해군 어뢰정 망명사건]] 때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신속히 자신들의 실수를 사과하고 한국 정부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1992년에 한중수교를 이끌어 낸다. 물론 이에 [[반비례]]하여 [[대만|중화민국]]과의 관계는 나빠졌는데 중화인민공화국은 자국과의 외교 정상화의 선제 조건으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자신들만을 [[중국 대륙]]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 [[대한민국]]도 실리를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고 중화민국과는 [[단교]]했다.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상협 국무총리의 첫마디는 '[[봉황]]이 날아들었다'로, 고려대에서 마오쩌둥을 강의하기도 한 중국 전문학자 답게 한방에 불시착 사건의 의미를 간파하였다. 양국 간 외교 관계에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